질문과 답변
결국 미국의 소련 문제 전문가 조지 케난이 나서 당시 유엔주재 소련대사 야콥 말리크와 비밀리에 접촉, 한국전의 휴전문제를 협의했다. 6월23일, 말리크는 유엔의 라디오 방송에 나와 한국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전 당사자 간의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틀 후인 6월25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소련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선언했다. 6월30일,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원산항에 있는 네덜란드 병원선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하자고 제의했다. 7월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회담이 열리고, 본회담 개최장소를 개성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틀 후인 7월10일, 쌍방은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열었고, 10월에는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협상을 계속했다.
첫날부터 공산 측(북한·중공)은 회담장에서 정치선전을 시작했고, 7월26일에야 겨우 토의 의제에 합의할 수 있었다. 회담은 2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일만 해도 38선 복귀를 고집하는 공산군과 現 전선을 주장하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대립, 합의에 이르는 데 4개월이 소요되었다. 포로 교환문제에서도 포로 전체의 강제송환을 주장하는 공산군과 포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한 자유송환을 주장하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맞서 거의 2년간 진전을 보지 못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당시 군사적 상황이 우리 쪽에 유리했으므로 좀더 압력을 가하면 그의 염원이었던 국토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휴전은 통일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장차 공산세력이 다시 한반도를 적화할 수 있는 빌미를 주게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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